We were seated on the front pew while the preacher introduced us to the congregation. I remember how well dressed my family was and how happy we were before the preacher began his sermon about blood mixing. My father held my weeping mother while my sister and I followed them to the car. I didn’t understand until later what that day meant, but it imparted upon me my first notion of prejudice, and growing awareness of my mixed Korean heritage.
Years moved forward while I studied photography. Soon after earning a master’s degree, I took the opportunity to work in Korea as a native English teacher. I boarded the plane with the idea that I would take pictures of the culture and heritage from which I was emotionally and physically divorced.
After spending the last few years in Korea, I witnessed a wide array of cultural experiences for which I am truly grateful. I cherish Korean life and society. However, I was naïve in thinking my mixed status would be overlooked. Koreans couldn’t understand why my mother never taught me her language. Sometimes I was scorned for speaking English. During these times when prejudice intrudes, I brace myself and try to blend in by being quiet; half of myself hides behind my camera while the other half observes, allowing me to look both out at the world and into myself.
I am pleased to find the world is a much larger place than I could have imagined, but footholds in two very different worlds comes with a tax. One cannot escape notions of race and stigma; they must be embraced while time re-assigns their meaning. This being so, I've embraced my experience and retell it as a photographic poem, "Half Eye."
Because Photography allows me to be half present, half removed from the life I know, I am able to share my perspective of Korea with others. At any given time throughout the day, my camera becomes a window into Korea that is simultaneously open and shut. My camera helps me see and together we become a unique half eye.
Years moved forward while I studied photography. Soon after earning a master’s degree, I took the opportunity to work in Korea as a native English teacher. I boarded the plane with the idea that I would take pictures of the culture and heritage from which I was emotionally and physically divorced.
After spending the last few years in Korea, I witnessed a wide array of cultural experiences for which I am truly grateful. I cherish Korean life and society. However, I was naïve in thinking my mixed status would be overlooked. Koreans couldn’t understand why my mother never taught me her language. Sometimes I was scorned for speaking English. During these times when prejudice intrudes, I brace myself and try to blend in by being quiet; half of myself hides behind my camera while the other half observes, allowing me to look both out at the world and into myself.
I am pleased to find the world is a much larger place than I could have imagined, but footholds in two very different worlds comes with a tax. One cannot escape notions of race and stigma; they must be embraced while time re-assigns their meaning. This being so, I've embraced my experience and retell it as a photographic poem, "Half Eye."
Because Photography allows me to be half present, half removed from the life I know, I am able to share my perspective of Korea with others. At any given time throughout the day, my camera becomes a window into Korea that is simultaneously open and shut. My camera helps me see and together we become a unique half eye.
목사가 우리를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교회의 맨 앞쪽에 앉아 있었다. 내 기억으로 그날 우리는 매우 근사하게 차려 입었었고, 그 목사가 ‘혼혈에 관해 설교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마냥 행복했었다. 아버지는 흐느끼고 있는 어머니를 감싸 안고 차로 가셨고 나와 내 여동생은 그 뒤를 따라 갔다. 그 날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한참 뒤에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나는 편견이라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또 내가 한국인의 유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자각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편견은 항상 함께 했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전형적인 미국소년들처럼 키움으로써 그 편견을 없애주려고 노력하셨다. 액센트를 고치기 위해
특별 스피치 수업을 들었고 주말마다 미국 아이들과 야구를 했다. 나는 절대 한국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조롱과 싸움을 견뎌냈고, 그저 우연히 동양인처럼 생긴 것일 뿐이라고 하며 내 눈의 반쪽 뒤로 숨어버렸다.
한번은 친할머니께서 나에겐 유럽계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는 말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은 악의 없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지않은 말들도 많이 하셨지만, 돌아가시기전에 할머니의 관점에 대해 용서해드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복잡한 인간이고 이 시대 산물이 아닌가.
사진을 공부하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석사학위를 따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강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 나는 감성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결별하고 있었던 한국의 유산과 문화를 사진에 담아오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몇 년을 한국에서 보내며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삶과 이 사회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혼혈이라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여질 것이라고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어머니가 그녀의 모국어를 내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 나는 영어를 한다는 것 때문에 경멸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편견이 내 삶을 방해할때면 나는 그저 조용히 스스로를 지키려 노력한다. 나의 절반은 카메라밖에, 또 다른 절반은 카메라 뒤에 숨은채로 내 내면과 세상을 동시에 관찰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 세상이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서로 상이한 두 개의 세상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인종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수치심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세월이 그 의미를 다시 부여할 동안 사람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진은 내가 알고 있는 삶 속에 절반은 실존하면서 다른 절반은 그로부터 비켜 있도록 해 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 한국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중 어떤 주어진 시간이라도 내 카메라는 동시에 열리고 닫히면서 한국을들여다 보는 ‘창’이 되었다. 카메라는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도와주며, 함께 우리는 단하나뿐인 반쪽눈이 된다.
내 인생에서 편견은 항상 함께 했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전형적인 미국소년들처럼 키움으로써 그 편견을 없애주려고 노력하셨다. 액센트를 고치기 위해
특별 스피치 수업을 들었고 주말마다 미국 아이들과 야구를 했다. 나는 절대 한국인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조롱과 싸움을 견뎌냈고, 그저 우연히 동양인처럼 생긴 것일 뿐이라고 하며 내 눈의 반쪽 뒤로 숨어버렸다.
한번은 친할머니께서 나에겐 유럽계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지는 말라고 하셨다. 할머니의 말씀은 악의 없는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지않은 말들도 많이 하셨지만, 돌아가시기전에 할머니의 관점에 대해 용서해드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복잡한 인간이고 이 시대 산물이 아닌가.
사진을 공부하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석사학위를 따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원어민 영어강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 나는 감성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결별하고 있었던 한국의 유산과 문화를 사진에 담아오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몇 년을 한국에서 보내며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한국의 삶과 이 사회를 나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혼혈이라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여질 것이라고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왜 어머니가 그녀의 모국어를 내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 나는 영어를 한다는 것 때문에 경멸 당하기도 했다. 이렇듯 편견이 내 삶을 방해할때면 나는 그저 조용히 스스로를 지키려 노력한다. 나의 절반은 카메라밖에, 또 다른 절반은 카메라 뒤에 숨은채로 내 내면과 세상을 동시에 관찰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 세상이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서로 상이한 두 개의 세상에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인종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수치심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세월이 그 의미를 다시 부여할 동안 사람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진은 내가 알고 있는 삶 속에 절반은 실존하면서 다른 절반은 그로부터 비켜 있도록 해 준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 한국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루 중 어떤 주어진 시간이라도 내 카메라는 동시에 열리고 닫히면서 한국을들여다 보는 ‘창’이 되었다. 카메라는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도록도와주며, 함께 우리는 단하나뿐인 반쪽눈이 된다.